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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정세랑

Reminiscence 2022. 2. 21.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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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년에 읽은 최은영의 '밝은 밤'이 좋았다고 말을 했더니 그는 정세랑을 추천했다. 바로 알라딘에서 책을 주문했다. 새해 들어서 여러 권의 책들을 읽다 팽겨친지라 이 책은 잘 읽히길 바랐는데, 끝까지 다 읽었다.

시선이라는 뿌리에게서 자란 대가족들이 어머니와 할머니의 10주기를 맞아 하와이로 그녀의 제사를 지내러 떠난다. (시선은 자녀들에게 절대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했지만.) 시선의 후손들이 하와이에 가서 각자에게 의미 있는 물건이나 어떤 것들을 모아와서 시선의 10주기 날에 그것들을 나누고 시선을 추억하는 일화 속에서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그 과정 속에서 구성원 각자가 갖고 있는 결핍과 아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것들을 치유해가는 과정이 시선의 10주년 제사일 수도 있겠다. 여성과 남성, 전쟁, 혐오, 생태주의, 제국주의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나에게도 그러한 문장. 누군가에게는 그 모험이 소진되는 행위일 수도 있겠다만 나에겐 에너지를 얻어가는 즐거운 시간들이지.

p.130 사람이 제일 신나는 모험이었다.

기억이 온전하진 않지만 소설이나 에세이에서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해서 뻔뻔하다고 표현한 글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내가 덜 읽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만. 종종 에세이에서는 본인의 글을 부끄럽다고 표현하는 작가들을 많이 봤지만,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이런 표현은 좀 신선하네. 아래 문장의 맥락은 '난정'이라는 '시선'의 며느리가 책을 무진장 많이 읽어서, 이제 글을 쓰는 게 어떤지 종종 권유했던 시어머니에 이어 글을 써보라는 딸의 제안에 대한 '난정'의 반응이다.

p.166 "너도 너희 할머니 닮아서는 그런 소리 그만해. 쓰는 게 뭐 대단한 것 같지? 그건 웬만큼 뻔뻔한 인간이면 다 할 수 있어. 뻔뻔한 것들이 세상에 잔뜩 내놓은 허섭스레기들 사이에서 길을 찾고 진짜 읽을 만한 걸 찾아내는 게 더 어려운 거야."

p.189 가져가고 싶은 걸 찾았는데,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 같은데 긍지 높은 가게 주인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설득에는 에너지가 들고, 화수는 에너지를 끌어올려야 했다. 주방 쪽을 힐끔힐끔하다가 그날은 결국 더 이어 말하지 못했다.

p.219 그러나 그보다 더 절박한 안위의 문제가 있습니다. 예술을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사람이, 남들이 보기엔 그럴듯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면서 천천히 스스로를 해치는 것을 제가 얼마나 자주 봤는지 아십니까? 정말 무시무시한 수준의 자해입니다. 아아, 이 사람 큰일났다. 싶을 땐 늦었고 곁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디다.

p.308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온 가족들은, 오전부터 바삐 집을 나서거나 구석에서 마지막 마무리를 하며 도사렸다.

p.330 "심시선 여사 닮았으면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p.331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내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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